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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관리자 date 2018.06.21
제목 2018 위드라이프 효·가족사랑 홍보대상(글짓기 장려상 수상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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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제목 : 화상 흉터보다 더 진한 남편의 무한사랑

 

작품 설명 : 어릴적 전기감전사로 전신화상을 입었음에도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내 병 보다도 먹고 살기에 급급한 가족들로 인해 사랑이 무언지도 모르고 살았으나 나를 전적으로 사랑해주는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며 메마른 내 마음에도 사랑이 천천히 싹트고 있다는 내용

 

팀명(지원자명) : 이 청 주

내 유년시절은 남들처럼 평범하지 못했다.

 

지독히도 가난한 집에서 347남매의 막내딸로 자랐다.

 

배고픔이 어떤 건지, 없이 사는 삶이 어떤 건지, 다 성장하기도 전에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가족이란 커다란 울타리는 있었지만, 그 울타리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서로를 아끼고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 그런 건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더불어 가족끼리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우리 가족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사랑도 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고 받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듯 우리 가족은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해 가면서 돈을 빌리고 눈치도 보고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사랑보다도 먹고 사는 게 제일 우선 순위였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난 남들과 조금은 다른 외모로 자랐다.

 

가난한 집 딸도 부족해 평범치 못한 외모로 자라다보니 가난이 싫다고 울부짖는 건 어쩌면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내 나이 열 살이던 그해, 3만 볼트가 넘는 전기변압기가 터지면서 전기에 감전되어 온 몸에 전신 3도의 화상을 입었다.

 

너무 까맣게 타버렸기에 시골 병원에서는 감히 손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알코올로 화상부위를 닦아내는 방법으로 한 달 여를 보내다 서울 큰 병원으로 옮겨보니 불에 타들어간 살들이 안으로는 이미 썩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로 인해 난 양쪽 발가락 엄지와 검지 두 개씩을 절단하였고 목과 가슴 부분도 쪼그라들어 목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덟 번의 피부이식수술과 절단되지 않은 발가락 봉합수술 등. 투병생활만 1년 넘게 했었다.

 

워낙 가난에 허덕이던 우리 집이었는데 감전 사고를 당한 나로 인해 더욱 가난에 찌들어갔다.

 

가족들은 내 아픔을 다독이는 것 보다 먹고 사는 것에 더 급급했던 터라 아픈 가운데서도 부모님께 응석을 부릴 여유도, 오빠와 언니들에게 과자 먹고 싶다고 떼 쓸 여유도 어린 내겐 허락되지 않았다.

 

언니들과 오빠는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남들 다 가는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채 서울로 올라가 공장으로 취직들을 하였다.

 

아버지는 내가 사고 나기 이전부터 도박과 술에 빠져 사셨는데 사고 이후엔 오로지 술에 의지하셨고 엄마는 계절마다 이웃집 밭매기, 모 심기, 파 작업 등등 다니셨다.

 

이러다보니 10살인 나를 간호하는 사람은 14살 먹은 언니였다.

 

한창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어야 할 언니가 병원에서 보호자 침대서 매일 새우잠 자고 밥을 떠먹여 주고 세수를 씻겨주고 소독을 할 땐 울며불며 소리 지르는 나를 참으라고 조금만 참아보라고 같이 울며 옆에서 내 눈물을 닦아주고. 나도 어리지만 겨우 4살 많은 언니가 나를 감당하기엔 참으로 버거웠을 것이다.

 

긴긴 투병생활 끝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학교생활을 다시 할 수 있는 자신이 없었다.

 

얼굴부터 온 몸이 화상흉터로 덮여져 있고 손이며 목이며 쭈글쭈글 일그러져 내 눈으로 내 몸을 보기가 상당히 힘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과연 낯가림이 심한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감보다도 덜컥 겁부터 났다. 학교를 그만두지 않는 한 나가야 했기에 소극적이고 낯가림 심하고 내 의사표현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내가 입에는 마스크를 하고 앞도 쳐다보지 못하고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숙여 땅만 보면서 학교를 나갔다.

 

예상한대로 아니, 예상보다 더 심하게 주위의 시선은 따가웠다. 웅성웅성 주위에서 내 얘기만 하는 것 같았다. 파충류부터 시작해서 더럽다, 징그럽다, 토 나온다 등등. 견뎌야 했다.

 

앞에 나서서 그만하라고 말 할 재주도 없었고 가난이라는 굴레가 나를 더 옭아매는 듯 했다.

 

밤마다 자면서 생각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일 눈이 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어떻게 매일매일 내 옆에 오지도 않는 아이들을 상대할 것이며 끼리끼리 내 이야기를 귓속말로 전하는 것을 볼 것이며...꿈도 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뜨면 아침이 되었고, 가고 싶지 않은 학교이지만 불쌍한 우리 엄마, 아버지 때문에라도 가야 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가난에 찌들려 사는 우리 집. 아버지가 매일 술에 빠져 살고 집안 물건 던지고 밥상 뒤집고 엄마 때리고..., 그런게 일상인데 거기에다 나마저 학교 다니기 싫다고 한다면 아버지가 엄마에게 하는 행패는 더 심해질 것이고 집안도 나아질리 없고 스스로 모든 걸 삭혀야 했다. 견뎌내야 했다. 늘 하루의 끝에서 스스로 울면서 내가 나를 다독이는 삶을 살았다.

 

가족 간에 사랑이라는 걸 전혀 받아보지도 못하고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다.

 

전신화상. 발가락 6. 지체장애인....내가 달고 다니는 수식어다. 사람들은 내게 결혼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가족들조차 혼자 사는 게 편한 거라고 하였지만, 이런 내게도 무한사랑을 나눠주는 남자가 있었고, 지금 모습 그대로인 나를 전적으로 사랑해주는 남자가 있었다.

 

5년 전 자원봉사 모임에서 만나게 된 사람 이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늘 같은 마음, 같은 시각으로 나를 대해 주었고, 무엇보다도 사고는 언제고 누구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다른 사람들 시선 따위 신경 쓰지 말라고, 스스로 자신 있고 당당하게 살면 되는 거라고 다독여 준 사람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고 그 사랑을 가득 배워 나도 사랑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결혼 이라는 걸 못한다고 했으나 나는 떳떳하게 5년 전 봉사 모임에서 만난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였고 사랑의 결실로 4살 아들과 2살 딸이 생겼다.

 

자라면서 너무 암흑 속에서만 지내 조금은 삶이 팍팍하고 사랑을 받아보지 못해 불우한 환경을 떠안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가족간에 사랑이라는 게 어쩌면 별거 아닌 것 일수도 있겠구나 싶다.

 

비록, 내 유년시절은 어둡고 무겁고 칙칙했으나 그땐 꿈꾸지 못한 삶이 밝고 긍정적이고 많이 웃을수 있는 지금의 삶이 결혼 후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 있었다. 화려하게 포장하지 않아도 가족이니까 다 감싸 안을 수 있고,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가족이니까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모든 걸 포용하고 사랑이란 테두리로 포근하게 안아줄 수 있는 그런 여유로운 삶이 내게도 평범함으로 다가왔으니 남편의 변함없는 진실 된 사랑이 이루어낸 결과물인 것 같다.

 

어릴 땐 가난이라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는데, 지금은 그 가난이라는 굴레가 전혀 싫지만은 않다.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의 힘이 가족 전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서 지금의 이 삶이 너무나도 감사하다.

 

더욱이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 남편 덕분에 날마다 행복이 배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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